일제에 맞섰던 '대한제국'군의 실제 군사력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제1대 황제인 고종은 서양의 신식 화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고종은 주변에서 그 무기가 좋다는 이야기만 들리면 바로 구입을 했고, 이번에는 러시아제 무기를 들여왔으니 다음에는 관계 개선 차원에서 영국제 무기를 들여와야 한다는 논리로 문어발식 신식 무기 도입을 늘려갔다.



이러한 고종의 애착은 신식군대로 이어졌고 '별기군(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신식 군대)'에서 '시위대'와 '진위대'로 이어지는 신식 군대 양성을 위해 국가 재정의 40%를 쏟아 부으면서 당시 좋다는 무기는 모조리 사들였다.


대한제국 별기군


별기군 창설 당시 일본에서 무라타 소총 200정을 들여오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의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러시아 군사고문단이 추천한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 독일제 <마우저 M1871 소총>, 영국제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 등을 수천 정씩 사들이더니, 1887년부터는 삼청동에 기기창을 만들고 아예 총기를 직접 생산하는 것까지 시도했다.


영국제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


또 신미양요 당시 포병에 당했던 설움 때문에 신식 화포 도입도 서둘렀다. 소위 암스트롱포로 불린 12파운드 야포는 물론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던 독일제 크루프 75mm 속사포도 도입했다. 여기에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과 당시로서는 강대국들만 보유했던 최신식 기관총인 맥심 기관총도 도입했다.



이런 무기들을 바탕으로 1898년에는 '시위연대'가 창설되었다. 이 시위연대는 2개 보병대대와 1개 기병대대, 1개 포병대대 등을 갖춘 근대적인 보병연대로 성장했고, 1902년에는 2개 연대로 확대 개편되어 약 5,000여 명의 병력과 최신 무기로 무장한 부대로 다시 태어났다.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은 이러한 시위대 이외에도 지방에 총 6개 연대 18개 대대로 구성된 21,000여 명의 진위대도 운영했기 때문에 구한말 대한제국의 군사력은 결코 약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26,000명의 근대화된 군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이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1904년부터 그 어떤 군사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일본이 <쓰시마 해전>과 <뤼순 전투>에서 러시아에 대승을 거두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자신의 군사력을 이용해 일본군의 배후를 칠 그 어떤 궁리도 하지 못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할 당시, 일본 육군의 총병력은 15만 명 수준이었는데, 1개 연대 병력을 한반도에 상륙시킨 이후 야금야금 병력 규모를 늘려 1904년에는 10만 명의 병력을 조선에 진주시키기에 이르렀다.


만약 고종이 좀 더 기민하게 움직여 지방에 산개된 진위대 병력을 집중해 운용하면서 일본군의 상륙을 방해하고, 러시아 극동군의 군사 개입을 좀 더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더라면 대한제국이 그리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한반도를 독점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일본은 1905년, 군대로 왕궁을 포위하고 친일파를 앞세워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 늑약에 따라 설치된 통감부는 1907년 고종을 독살하고 순종을 옹립했다.


통감부


이후 친일파에 둘러싸인 순종은 왕궁 호위를 위한 1개 대대 병력의 시위대 병력만 남기고 대한제국군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한편 일본은 대한제국군의 저항에 대비했다. 수도 한성에는 신식 장비로 무장한 시위대 2개 연대 약 5,000여명의 병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제13보병사단 전 병력을 서울로 불러들이고, 제12보병여단 병력을 대대급으로 나눠 평양과 대구, 대전 등 진위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에 내려 보냈다.



이들은 대한제국 장병들을 연병장에 불러 모으고 군모를 벗기고 계급장을 뗐다. 그리고 해산을 명령했지만, 서대문에 주둔하고 있던 제1시위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무엇이 아깝겠는가"라며 해산을 거부하고 자결했다.


박승환 참령


박 참령의 순국이 도화선이 되어 시위대원들은 무기고를 열고 무장한체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조칙이 내려지기 이전부터 탄약고를 비워놓고, 시위대 주둔기지를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70여명이 전사하고 100여명이 부상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흩어진 군인들은 의병이 되거나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했다.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던 대한제국군!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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