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무시하지 못하는 나라

베트남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 중 중국과 두 번째로 교역이 많은 국가다. 그럼에도 중국이 베트남의 국익을 침해하려고 하면 베트남의 민·관·군은 이에 분연히 맞섰다. 미리 엎드리거나 알아서 기는 행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연유로 중국과의 장군멍군식 관계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월남전이 끝나고, 3년이 흐른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친중국 성향의 '폴포트'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에 중국은 1979년, 10만명의 병력을 투입해 베트남을 침공했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10만명을 추가 투입한다. 병력뿐만 아니라 무기의 물량과 질적인 면에서 압도적으로 앞서있던 중국은 졸전 끝에 2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베트남에서 철수 하기에 이른다. 소국이 대국을 이긴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1988년 3월

중국이 양국 사이에 영유권 다툼이 있는 남중국해 '스프래틀리제도'의 6개 섬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5월에는 양측 해군 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그 결과 베트남 군함 3척이 침몰하고 베트남 해군 70여명이 사망했다. 열세한 해군력으로 인해 결과 예측이 가능함에도 베트남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교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1991년

양국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남중국해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은 지속됐다.


그리고 2011년 5월

중국 측 순시선 3척이 베트남 중남부 '나짱' 부근의 해상에서 베트남 석유·가스 탐사선의 해저 케이블 선을 끊었다. 이에 말싸움의 공방전이 곧바로 베트남의 반중 시위로 번졌다.




하노이 시내에서 반중시위가 벌어졌고, 베트남 총리는 32년 만에 징병 관련 법안에 서명했다. 한 군부 인사는 "중국이 파라셀 제도를 점령하면 우리는 육로로 중국을 공격하겠다"는 발언은 했다. 이는 1978년 당시 베트남을 침공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중국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킨 것이었다.


2014년 5월에는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베트남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파라셀 제도 인근에 중국이 10억달러짜리 석유시추 장비를 설치하자 베트남의 초계함이 현장에 투입되어 철수를 요구하고 나섰다.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30여척의 어선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시추장비 보호를 위해 파견된 중국 군함 3척과 80여척의 중국 어선과 충돌했다. 항공기와 헬기도 동원됐다. 10일 동안 지속된 충돌에서 베트남 경비대원 9명이 부상하고 선박 8척이 파손되자 베트남에서 또 한번의 반중 시위가 발생했다.



사망자가 속출했고, 중국인 소유의 수십개 공장이 잿더미로 변했다. 많은 중국인과 화교들이 베트남을 탈출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중국은 7월 16일, 파라셀 제도 인근에 설치했던 석유시추설비의 임무가 완료돼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불과 4년 전의 일이었다.


이 정도 역사라면 서로 쳐다볼 것 같지도 않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베트남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 중 중국과 두 번째로 교역이 많은 국가다.




베트남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중국은 물론 한국에 비해서도 많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베트남은 주권국가로서 기죽거나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대국을 대했다. 이런 연유로 중국은 베트남을 가벼이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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