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을 중시하는 미국이 강제 수용소를 운용했던 이유
- DAILY TALK
- 2018. 7. 23. 08:00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국내와 점령지에서 유대인 혈통을 가진 이들을 따로 분류해 격리했으며, 전쟁 중후반기에는 강제수용소에서 최대 10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이는 사상 최악의 전쟁 범죄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하지만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나치의 만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비슷한 기간 미국 역시 민간인들을 태생적인 민족과 혈통의 문제로 구금했던 사례가 있었다는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에 정박한 태평양 함대에 기습을 가하면서 '태평양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이날 미국의 피해는 처절했다. 총 12척 이상의 군함이 반파 당했고, 항공기 188대가 소실되었으며, 수병 2,403명이 사망했다. 여기에 민간인 68명까지 사망하면서 2차 세계대전 참가에 유보적이던 미국 여론은 일시에 참전 분위기로 돌아섰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날리며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됐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쟁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계 이민자들, 즉 재미 일본인들이었다.
대다수의 언론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재미 일본인들이 미국 내에서 스파이 노릇을 하며 일본과 내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JAPS잽스(Japanese 의 줄임말로 일본인을 비하하는 말)
물론 일부 언론은 이들이 미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훌륭한 미국인들이라고 변호하기도 했으나, 이미 전쟁이 시작된 판국이다 보니 미국 내의 여론은 이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은 이들의 내통설이 신빙성이 없다는 결론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하필 이때 '니하우' 사건이 밝혀지면서 일본계 2세들에게 불리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니이하우 사건이란 진주만 공습 당시 피격당한 일본군 조종사 '니시가이치 시게노리'가 하와이 제도의 '니하우섬'에 추락하며 벌어진 사건이다.
처음 원주민들은 개전 사실을 몰랐으나 곧 그가 하와이를 기습하다가 추락한 적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원주민들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시게노리'는 니이하우 섬에 거주하던 현지 일본계 미국인들 세 명의 협력으로 무기를 얻어 인질까지 잡고 탈출을 기도하다가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재미 일본인들 처우 결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고, 이 사건을 직접 접한 미 서부사령관 '존 드윗' 중장은 재미 일본인들의 충성심을 심각하게 의심하며 이들의 격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초반에는 FBI뿐 아니라 미 법무부까지 그들을 구금할 근거가 없다며 드윗 장군의 주장을 반대했지만, 당장 전쟁이 가능했던 지역인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연방 정부를 설득해 '적국민 법'을 근거로 일본, 독일, 이탈리아 국적자를 적으로 지정하며 본격적인 격리 조치를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통령 행정명령 9066호를 단행하면서 서부 해안에 인접한 '주'에서 일본계 혈통을 가진 이들이 강제 이주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하와이를 제외한 미 서부 해안에는 약 12만 명에 가까운 일본계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중 11만 명 가까이가 군사시설에 마련된 일본계 격리 캠프에 강제수용됐으며, 이 중 62% 이상은 순수 미국 국적자였다.
이에 강제수용된 재미 일본인 일부가 불법적인 구금에 대해 법정 투쟁에 나섰다. '프레드 고레마쓰' 같은 인물은 행정명령 9066호가 미국 수정헌법 5조를 위반한다며 저항하다 체포됐고, '엔도 미쓰에' 같은 여성은 1942년부터 법정 투쟁을 시작했다.
미 전시 재배치국은 1944년경 소송 취하를 조건으로 석방까지 제안했으나 그녀는 재판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 제안을 거절했다. 심지어 엔도 미쓰에는 대부분의 재미 일본인들이 대부분 수용시설에서 풀려난 후에도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수용시설에 남아,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1944년 12월 18일자로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기 전날인 12월 17일자로 공고를 내 1945년 1월부터 구금되어 있던 재미 일본인들의 귀향을 허가했다.
현재 미국은 학교 역사 교재에 이 재미 일본인 구금 사실을 기술함으로써 과거의 과오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전시의 특수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 국민을 강제 구금했던 사실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반성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반성할 과거는 분명하게 반성하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도다.
'DAILY TAL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대한민국의 대형 참사들 I (0) | 2018.07.31 |
---|---|
인류의 운명이 걸린 무색 콜라(?) 개발 프로젝트 (0) | 2018.07.24 |
호주에 만리장성보다 긴 토끼 울타리가 생겨난 사연 (0) | 2018.07.21 |
전 세계인의 중요 문화로 자리 잡은 히틀러의 유산 (0) | 2018.07.20 |
모르고 지나쳤다 큰코다치는 뜻밖의 교통 법규들 (0) | 2018.07.13 |
이 글을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