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ITARY TALK 데일리톡 2018. 11. 15. 13:53
68년 전인 1950년 10월 20일, 중공군 5개 사단이 압록강을 넘었다. 중국의 6·25전쟁 개입이 본격화된 것이다. 최초로 강을 건넌 병력은 약 20만 명, 참전한 전체 병력은 약 135만 명으로 추산된다. 엄청난 숫자를 바탕으로 중공군은 초기에 문자 그대로 인해전술을 펼쳤다. 소총 한 자루 들고 징과 꽹과리를 치며 돌격해 왔다. 그런데 이 많은 병력이 하루 세 끼 무엇을 먹고 싸웠으며, 중국은 엄청난 식량을 어떻게 조달했을까? 미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군은 물론 연합군에게도 식량을 보급했다. 반면 건국한 지 1년이 겨우 지난 중국은 전쟁 전의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나라였다.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부터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물론 처음부터 준비가 안 됐던 것은 아니다. 중국 기록..
더 읽기
MILITARY TALK 데일리톡 2018. 9. 27. 10:14
보통 '터키' 하면 떠오르는 것이 형제의 나라이다. 그 이유 중 하나인 '한국 전쟁' 당시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1만 4천936명) 파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면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또 다른 진실이 숨어있다. 한국 전쟁 당시 파병됐던 터키 병력의 반 이상이 터키인이 아닌 '쿠르드족'이었단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터키의 '소수민족'을 취재하던 한 기자로부터 시작된다. 터키의 소수민족에 대한 취재를 하던 기자는 우연찮게 '쿠르드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듣게 된다. 자신은 한국 전쟁 참전 용사였으며, 당시 한국으로 파병된 참전용사의 60% 이상이 쿠르드족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접한 기자는 진실을 찾기 위해 쿠르드족을 찾아 나서고, ..
MILITARY TALK 데일리톡 2018. 9. 10. 09:00
미국에는 "You Are Not Forgotten(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라는 모토로 전 세계 오지에 흩어진 미군 전사자의 유해를 지구 끝까지 추적해 결국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되돌리는 유해 발굴단 'JPAC 특수부대'가 있다. 이러한 사후 처리로 인해 미군의 투지가 높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미국 외에는 전 세계 그 어떤 국가도 이러한 부대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일개 육군 중령의 진급도 포기한 십수 년에 걸친 노력 끝에, 대한민국에 세계 2번째로 JPAC과 같은 유해발굴 전문부대가 창설되는데, 바로 'MAKRI 특수부대'가 그것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Mnd Agency for Kia Recovery & Identification) 우리나라에서의 이러한 유해발굴은 2000..
MILITARY TALK 데일리톡 2018. 8. 25. 09:00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틀이 지난 1950년 6월27일, 당시 미 해·공군의 참전이 결정돼 있었지만, 이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리 국군의 전력만으로는 북한군 T-34 전차를 막을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결국 28일 개전 4일만에 서울은 함락됐다. 이후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국군은 치열한 공방을 거듭하며 방어전투를 수행했고, 이로써 미 지상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30일 밤에 미 국무장관, 국방장관, 각군 장관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지상군 참전 승인을 받았다. 이어 찰스 B. 스미스 중령이 406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대전으로 파병된다. 이후 제52포병대대가 합류하면서 스미스 부대는 '특수임무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1950년 7월5일 오전 8시, 미..
MILITARY TALK 데일리톡 2018. 8. 24. 09:00
한국 전쟁 초기, 미 공군의 활동 거점은 일본에 위치한 기존 비행장들이었다.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B-29 폭격기처럼 저 멀리 오키나와에서 출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전술 작전기들은 한반도와 가까운 큐슈 일대의 여러 비행장들을 발진 기지로 사용하였다. 당시 전선의 상황이 너무 나빠 한반도에 안전한 비행장을 확보할 수 없었고,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방이 치열해지자 좀 더 가까운 곳에 전진 기지를 설치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대구 비행장으로 일부 부대를 전개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워낙 활주로의 상태가 불량하여 당시 미 공군의 주력 전술기인 F-80을 운용하기 어려웠다. F-80 고심 끝에 제트기의 등장으로 2선으로 물러난 P-51을 운용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대지 공격에는 그..
MILITARY TALK 데일리톡 2018. 8. 3. 09:00
여러 이유 때문에 사격 훈련 후 반드시 탄피를 회수한다. 재활용 목적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총기 사고를 미연에 예방하기 위해서다. 이론적으로 훈련에 투입된 총탄과 사격 후 회수된 탄피의 숫자가 같으면 유출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격장에서 훈련 관련자들이 탄을 분배하고 사격 후 반납하는 탄피수를 일일이 맞춰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다.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창군 초기부터 있어왔던 전통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38선 전역에서 기습 도발을 감행했다. 이때 서울로 통하는 주요 축선인 임진강 남단의 파주 지역을 방어하던 부대는 제1사단 13연대로 예하 2대대와 3대대는 38선을 경계 중이었고, 1대대는 후방에 예비대로 주둔 중이었다. 훈련 도중에 전쟁을 맞게 된 1대대는 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