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당황시켰던 대한민국 공군의 위대한 도전

한국 전쟁 초기, 미 공군의 활동 거점은 일본에 위치한 기존 비행장들이었다.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B-29 폭격기처럼 저 멀리 오키나와에서 출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전술 작전기들은 한반도와 가까운 큐슈 일대의 여러 비행장들을 발진 기지로 사용하였다.




당시 전선의 상황이 너무 나빠 한반도에 안전한 비행장을 확보할 수 없었고,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방이 치열해지자 좀 더 가까운 곳에 전진 기지를 설치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대구 비행장으로 일부 부대를 전개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워낙 활주로의 상태가 불량하여 당시 미 공군의 주력 전술기인 F-80을 운용하기 어려웠다.


F-80


고심 끝에 제트기의 등장으로 2선으로 물러난 P-51을 운용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대지 공격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는 기종이었다.(이때 운용 주체로 한국 공군이 선정되었다.)


P-51


이에 따라 한국 공군은 7월 초, 10여 기의 P-51을 인수하였다. 그러나 한국 공군은 실질적인 전투기 운용 경험이 없었기에 즉시 교전에 투입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국 공군 단독으로 출격이 가능하도록 교육이 실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 공군의 실질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바우트 원(Bout One)'계획이었다.


이때 훈련부대인 제6412부대를 이끌고 프로그램을 운용한 인물이 영화 '전송가'로 유명한 '딘 헤스(Dean Hess)' 대령이다.



처음에 제6412부대는 대구에 자리 잡았지만 북한군이 낙동강 일대까지 밀고 내려오자 안전을 위해 후방으로 기지를 옮겼다. 이때 딘 헤스의 부대가 이동 전개한 곳이 진해였는데, 말이 비행장이지 활주로의 길이도 짧고 그동안 방치되어 있어 제대로 된 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8월초에 공산군이 마산 인근까지 나타나 그리 안전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상황에서 더 이상 다른 대안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악조건에서 훈련과 교육에 매진하던 중 연료가 부족한 미 공군의 F-80기가 일본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진해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불시착한 F-80은 대부분의 한국 공군 요원들에게는 처음 접한 제트기였다. 당시 조종사는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고 안전하게 구조되었지만 F-80은 돌바닥과 다름없던 활주로에 동체 착륙을 하였던 관계로 엄청난 손상을 입었다.



기체를 조사한 제6412부대 소속 미군 정비사들은 손상이 너무 심하여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한국 정비사들이 나섰다. 미군들은 피교육생이던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한국 정비사들의 행동을 비웃었다.


변변한 장비도 없던 정비원들은 수동식 작키를 이용하여 조금씩 동체와 땅바닥의 틈을 벌여 나무를 일일이 괴어가며 기체를 들어 올렸다. 중심이 맞지 않으면 부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동체를 조심스럽게 올리고 랜딩 기어를 내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몇 일간의 수작업으로 휘고 파인 동체와 주익을 곧바로 폈다.



처음에 비웃음으로 지켜보던 미군들은 한국 정비원들의 실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고 후방의 회수팀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그렇게 한국 정비사들의 노력으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값 비싼 전투기를 회수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그동안 함께 어울리며 활동하였지만 교육을 시키던 입장이어서 한국 정비사들의 실력을 한참 아래로 내려 보던 미군들은 이후부터 고급 기술을 전수하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미군 내에서도 이런 소식이 전파되었고 후진국의 보잘 것 없는 공군으로 평가되던 한국 공군의 위상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실력이 거름이 되어 한국 공군은 급속한 성장을 이룰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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