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이 일본을 살렸다?

2017년 8월 15일은 우리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지 72주년이 되는 날이며,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날이기도 하다.


조선인이 아닌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는 일본군



1941년 진주만 사건으로 개전하게 된 태평양전쟁은 사실상 3년에 걸쳐 광대한 태평양 위의 섬들을 무대로 싸운 지루한 공방전이었다.


드넓은 태평양 바다의 수많은 섬에서 일일이 싸울 수 없었던 '연합군(미국·영국·중국)'은 방비가 튼튼하고 병력이 집중된 섬은 우회해버리고, 상대적으로 방비가 약하 되었으며, 지정학적으로는 일본 본토에 접근하기 유리한 섬 위주로 공략하는 통칭 '아일랜드 호핑' 전략으로 대응했다.


아일랜드 호핑 Island Hopping


그리고 1942년 6월, 일본은 미드웨이 앞바다에서 있었던 '미드웨이해전'에서 패배한 이후 작전적 기세가 꺾였고, 수세로 돌아선 연합군은 서서히 일본 본토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인 '이오지마' '오키나와'에서 의외의 저항에 직면한다.


미드웨이 해전


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치른 이오지마 전투는 태평양 전역에서 가장 많은 병력 손실을 야기했다.


이오지마에 상륙하는 연합군


당초 작은 섬이었기 때문에 손쉽게 이 섬을 점령할 것이라는 연합군의 예상과는 달리 이곳에서 결사 항전을 결심한 일본군의 반격에 3월 말경, 결국 미국이 이 섬을 점령했을 땐 미 측은 약 2만 2000명의 손실을 입은 일본군의 3배에 달하는 약 7만 명의 병력 피해를 입었다.


당시 연합군이 이 작은 섬을 원했던 이유는 추후 실시할 본토 공격에 앞서 병력을 집결할 집결지로 활용할 수도 있었고, 이곳에 활주로가 세 개나 깔려 있었기 때문에 혼슈로 출격시킬 항공기들이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945년 4월부터 실시하게 된 오키나와 전투는 사실상 일본군 최후의 저항이 벌어진 곳이었다. 약 80일간 치러진 이 전투는 엄청난 가미카제 공격과 처절한 자살 돌격으로 점철되었으며, 군인 전사자만 도합 12만 2000명(미군 1만 2000명, 일본군 11만 명)이 발생했고, 민간인 사망자도 약 10만 명이 넘는 유혈 사태로 기록됐다.


오키나와에 상륙한 연합군


그간 일본군은 이오지마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투 직전에 민간인을 퇴거시켜왔지만, 본토인도 아닌 '류쿠인'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3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그대로 전투에 휘말렸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류쿠인들을 인간 방패로 동원하고 섬 방어 전력으로 강제징집했으며, 미군 또한 민간인과 일본군을 따로 구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엄청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것이었다.



심지어 일본은 미군이 야만인들이기 때문에 포로로 생포 당하면 끔찍한 잔혹 행위를 가할 것이라고 선동했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가 거의 결정 났을 무렵엔 가족들을 전부 죽이고 자살하는 현지인들까지 줄을 이었다.



결국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일본 본토로 들어가기 위한 모든 여건이 조성된 미군은 도쿄로 진주하여 메이지 신궁에 성조기를 꽂아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했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태평양전쟁 최후, 최대 규모의 작전인 '다운폴(Downfall, 멸망)' 작전을 입안했다.


이 작전은 두 개의 작은 작전으로 다시 나뉘었다. 일단 1차로 실시할 '올림픽(Olympic)' 작전은 오키나와를 집결지로 활용하여 규슈를 점령하는 것이었고, 2차로 실시할 '코로넷(Coronet)' 작전은 연합군이 혼슈의 간토 지방으로 상륙하여 도쿄까지 점령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지형이 너무 뻔했기 때문에 일본 역시 연합군이 어느 방향에서 어디를 목표로 진격해 올지 예상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본 측의 방비를 고려해 연합군은 사실상 태평양에 전개했던 모든 전력을 끌어모아 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전을 치를 각오를 했다.


이로써 연합군은 42척의 항모와 24척의 전함, 400척의 구축함과 호위함, 총 14개의 상륙 사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동원됐던 사단 수는 12개 사단 정도였다.


일본 역시 연합군의 본토 공격에 앞서 방비를 서둘렀으며, 이미 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해진 상황이지만 대신 연합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안겨 완전한 패전국이 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일전을 각오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연합군이 일본 내로 진격하는 것뿐이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작전을 계획대로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돌입했지만, 1945년 8월이 다가오면서 결정적인 변수가 발생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사전 조율을 하지 않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 남하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사실은 일본뿐 아니라 연합군까지 당황하게 했다.



갑자기 후방인 북쪽에서 소련이 내려오면 이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놔뒀다가는 일본이 소련에게 점령당할 판국이 된 것이다. 결국,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의 조기 항복을 강요하기 위해 그 당시까지 수뇌부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던 비밀 무기인 원자탄의 사용을 재가했으며, 두 발의 원폭과 함께 일본은 1945년 8월 14일부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사실 일본이 원자탄과 소련의 선전포고 중 어느 쪽을 더 위협적으로 인지하고 항복했는지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이렇게 전쟁이 종결되면서 미군 측은 최소 50만 명에서 150만 명, 일본은 민간인까지 최대 500만 명에서 1000만 명까지의 피해를 예상한 '다운폴' 작전은 자동 폐기됐다.



미군은 이 작전 실시에 앞서 사전에 추산한 예상 부상자 수에 근거해 부상자에게 수여하는 '퍼플하트' 훈장 50만 개를 제작했는데, 이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을 치르면서도 전부 소진되지 않고 12만 개 이상이 남아 전쟁이 끝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당시 제작한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소련의 개입 때문에 결과적으로 둘로 갈라진 한반도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만약 '다운폴 작전'이 성공했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