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장교들이 무장 탈영을 선택한 이유

1994년 9월 27일, 육군 53사단 127연대에 소속되어 있던 장교 2명, 부사관 1명의 무장 탈영 사건이 발생한다. 각 매체는 이 기상천외한 탈영 사건을 앞다투어 속보로 다뤘다.



사건 당일인 9월 27일 오전 2시 40분, '황정희 하사''조한섭 소위'는 각각 수류탄과 M16 소총으로 무장한 채 전 소대원을 연병장에 집결시켜 자신들의 탈영 목적을 설명하고, 황 하사의 현대 프레스토 승용차를 이용해 순식간에 부대 밖을 빠져나왔다. 이를 제지하려는 병사들에게 공포탄 위협사격을 가하며 무리 없이 부대 밖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국의 자동차 수출 시대를 연 현대자동차 프레스토


부대 밖을 빠져나온 이들은 근처 주유소 앞에서 대기 중이던 '김특중 소위'를 태우고 목적지인 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들이 탈영한지 3시간이 지나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53사단 지휘부는 뒤늦게 경찰에 협조를 요청, 군·경 합동으로 이들의 체포 작전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군·경은 이들이 부산에 침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금정구 청룡동 팔송 검문소와 경부선 톨게이트, 해운대구 석대동, 송정동 등지의 검문소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등 특별경계근무를 시행했다.



한편 경남 양산시 원동면 태북마을 일대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마주하게 된 이들은 M16 소총을 이용해 출동한 경찰차를 파괴하고, 인근 야산으로 도주했다. 이후 총격전 2시간 만에 김특중, 조한섭 소위는 경찰에 투항하였다.



경찰은 두 탈영 장교를 군 헌병대에 이첩하였고, M-16 소총과 실탄을 회수하였다.



그러나 황정희 하사는 적금 해약금 120만 원과 수류탄 두 발을 휴대한 채 인근 야산으로 도주했다.

군·경은 황 하사 아버지를 헬리콥터에 태워 확성기를 통해 황 하사의 투항을 권고하였다. 또 황정희 하사가 어둠을 틈타 다른 지역으로 도주할 것을 대비해 경북 청도와 밀양 방면 등 주요 국도에서 검문, 검색을 강화하였다.



그렇게 3일간의 대치가 계속되었고, 결국 9월 30일에는 황정희 하사도 투항함으로써 장교들의 무장 탈영 사건은 막을 내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검거된 이들을 심문하던 군·경은 놀라운 사실을 알아낸다.


황하사가 근무하던 대대 소속의 사병들이 소대장에게 경례를 하지 않거나 내무반에서 도박을 하며, 심지어 장교까지 폭행하는 등 고의적인 하극상 행위를 하였다는 것이다.



해당 부대의 사병들은 평소 소대장 방에서 고스톱을 치고 상·병장 등 고참들이 소대장들에게 반말을 하도록 후임에게 지시했으며, 부대에 신임 소대장이 부임할 경우 소대장 전투화를 감추는 등 '신임 소대장 길들이기'로 군기강이 떨어져 있었다.


김특중 소위와 조한섭 소위는 이 같은 군기문란을 시정해달라고 소속 중대장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소대장이 이등병을 구타하는 병장을 만류하다 오히려 병장에게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중대장이 미온적으로 처리하자 이를 언론에 알리기 위해 탈영을 결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접한 국민들은 해이해진 군 기강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고, 북한을 탈출해 귀환한 조창호 소위 역시 이 사건을 신랄히 비난하였다.



이후 육군 당국은 '초소장(소대장)'을 폭행한 신 병장 등 4명을 상관 폭행 혐의 등으로 구속했으며, 해당 사건을 묵살한 중대장과 대대장을 구속, 군사재판에 회부하였고, 군사재판에서 탈영병 조한섭 소위와 김특중 소위는 징역 7년을, 황정희 하사는 징역 10년을 선고받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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