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공식이 된 돈가스에 양배추는 전쟁의 부산물?
- DAILY TALK
- 2018. 9. 19. 09:00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가는 것처럼 세트 음식 중에는 하나라도 빠지면 서운한 찰떡궁합이 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재료라도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어딘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돈가스와 양배추'다.
흥미로운 사실은 돈가스를 먹을 때 가늘게 채친 양배추를 함께 먹는 나라가 비단 우리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역시 가늘게 썬 양배추를 함께 내놓으며 타이완에서도 돈가스는 양배추와 함께 먹는다. 한마디로 돈가스를 먹는 나라에서는 모두 샐러드로 가늘게 채 썬 양배추를 함께 내놓는다는 것인데 도대체 누가 법으로 정해 놓기라도 한 것일까? 어떻게 '돈가스에는 양배추'라는 아시아 공통의 암묵적 합의가 만들어진 것일까?
돈가스와 양배추의 조합은 엉뚱하지만 전쟁이 계기가 돼 만들어진 공식이다.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이 싸운 '러일전쟁'이 간접적인 계기가 됐다.
알려진 것처럼 돈가스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음식이다.
프랑스에는 송아지 고기에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튀기는 '커틀릿(cutlet)'이라는 요리가 있는데 이것을 일본 사람들이 송아지 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사용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변형시킨 것이 돈가스다.
프랑스 커틀릿
일본에서 처음 돈가스를 만들어 판 식당은 1895년 도쿄의 중심부 긴자에 문을 연 '렌가테이(煉瓦亭)'라는 프랑스 레스토랑이다.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으니 12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음식점이지만 처음에는 무척 고전했다고 전해진다. 기름과 버터를 많이 사용하는 정통 프랑스 음식이 당시 일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아 생각보다 매출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출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1899년, 서양식 커틀릿 대신 새로운 메뉴로 돼지고기를 사용한 '포크 가츠레츠'를 개발했다. '가츠레츠'는 커틀릿의 일본식 이름이다.
렌가테이(煉瓦亭)
이후 돈가스를 새로운 메뉴로 개발해 그런대로 매출 부진에서 벗어났던 '렌가테이'에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이 시기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주방에서 일하던 젊은 요리사들이 모두 징집돼 전선으로 떠났고, 이로 인해 일손이 줄어들면서 돈가스를 튀겨내기에도 바빠졌다. 다른 메뉴는 제대로 차려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고민에 빠져 있던 주인이 결단을 내렸다. 이전까지는 당근이나 양배추를 삶고, 감자를 굽거나 튀겨서 사이드 메뉴로 제공했지만 조리할 일손이 모자라는 만큼 아예 양배추 한 종류만 제공하면서 그것도 삶는 과정을 생략한 채 가늘게 채 썰어 마요네즈와 함께 내놓자는 것이었다. 양배추는 다른 채소와 달리 익히지 않아도 맛이 있는 데다 채썰기만 하면 되니까 일손을 크게 덜 수 있다. 시식 단계에서는 맛에 대한 평가가 좋았지만, 평가자들이 너무 낯설어했기 때문에 손님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손님에게 채 썬 양배추를 사이드 메뉴로 제공한 결과,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처음에는 생양배추를 낯설어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좋다는 반응이었다. 삶은 양배추보다는 생으로 채 썬 양배추가 기름에 튀긴 돈가스와 조화를 이루면서 입안이 개운해진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돈가스에는 삶은 채소 샐러드가 아닌 양배추를 날로 썰어 제공하는 것으로 고착됐다. 러일전쟁이 만들어낸 예기치 않은 결과였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
또한 양배추는 일본인들의 식생활 습관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일본 사람들은 채소를 반드시 조리하거나 익혀서 먹었지 날로는 먹지 않았다. 예컨대 중세 유럽에서 야만인이나 가난한 사람들만이 채소를 날로 먹는다고 여겼던 것처럼 일본 역시 생채소의 식용을 꺼렸다.
그러다 돈가스에 생양배추를 곁들여 먹기 시작하면서 채소 생식이 시작됐으니 일본인의 식습관과 역사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돈가스에는 채 썬 양배추’라는 아시아 공통의 돈가스 메뉴 공식까지 생겼다. 러일전쟁의 여파가 식생활 습관의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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