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미국보다 많은 병력을 파병한 나라
- MILITARY TALK
- 2018. 7. 10. 08:00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약 2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3일 만에 함락을 당한 뒤 계속 밀려 후퇴하고 있었다. 후에 UN에서는 긴급안전보장회의를 열게 되었고, 한국에 군대 파견을 결의, 각 국가의 파견을 권고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 16개국이 군사를 파견하게 되었고, 5개국이 비군사지원으로 파견을 하였다. 그 중에 89명이 참전한 유럽의 작은 도시 국가가 있었는데...
바로 룩셈부르크이다.
작은 도시국가로 형성되어 있는 국가 '벨기에'와 '네널란드' 사이에 있는 국가가 바로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의 병력 규무는 소대 규모로 참전한 유엔군 중에 제일 작은 미니부대였다.
UN군사령관 멕아더는 당시 UN사무총장과 미 국무부에 1천명 이상의 인원이 참전해야 천전국가로 인정한다고 말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최소기준을 예외로 한 국가가 바로 '룩셈부르크'였다.
6.25전쟁에 참전한 룩셈부르크 소대
그 당시 룩셈부르크 인구는 20만명이었다.
이런 룩셈부르크는 사전에 벨기에와 협의하여 소대로 함께 참전을 하는 것으로 하였고, 벨기에 대대에 소속되어 함께 움직였다.
6.25전쟁에 참전한 벨기에 대대
참전기간은 1951년 1월 ~ 8월까지 1차, 1952년 3월에서 53년 1월까지 2차로 나뉘어 주둔해 있었다. 그 결과, 7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도 입었다.
룩셈부르크는 대표적으로 3가지 전투를 수행하였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에서의 '금굴산 전투'와 '학당리 전투', 그리고 '김화 잣골 전투'로 대표적인 3가지 전투가 있다.
첫 번째로 '금굴산 전투'에서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소대'가 중공군의 1차공세를 막고자 노력하였다. 이 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4일간 전투가 진행되었고, 한 때 포위 되기도 하였으나 진지를 끝가지 지켜내고 의정부로 철수했던 전투이다.
두 번째로 1951년 10월 11일 ~ 13일에 중공군 78사단과 벌인 '학당리 전투'에서도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소대'는 2차례 공격을 굳건히 막아내며 전과를 올린다.
그리고 약 2년 뒤인 1953년 2월 26일부터 4월 21일 약 두달간 김화에서 벌인 '김화 잣골 전투'에서는 중공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격퇴하였다.
벨기에 - 룩셈부르크 참전비
비록 룩셈부르크군이 소규모라 하더라도 후방에서 편하게 작전을 편쳤던 것은 아니었다.
전사 및 실종자 7명에 21명의 용사들이 부상당하였을 정도로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는데 이러한 규모를 분석하면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모든 참전국들 중 총 인구 대비 참전 병력 비율 및 전사자 비율이 1위를 하였을 만큼 대한민국에게 최선을 다해 주었던 나라이다.
'MILITARY TAL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적 고립 속에 대만이 개발한 자국산 전투기 (0) | 2018.07.15 |
---|---|
과장된 평가로 서방을 공포에 빠트린 구소련의 전투기 (0) | 2018.07.14 |
디폴트를 맞이한 아르헨티나의 특이한 전투기 구입법 (0) | 2018.07.14 |
미국이 자국과 동맹국의 영토에 핵폭탄은 투하한 이유 (0) | 2018.07.13 |
M16에 밀려 5년 만에 퇴물로 전락한 비운의 소총 (0) | 2018.07.12 |
이 글을 공유하기